건조

2007/10/21 22:11
내 삶은 건조하다.
필요가 아니면 하지 않는 일들.
다른 사람은 부족하다고 난리인 시간이 나에게는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나도 바쁜 일상을 살고 싶다.
여러가지 시도를 해 보지만 그래도 내게 시간은 흘러넘친다.

최소한으로 사려는 나의 모습.
나한테는 요즘 세상엔 흔해빠진 강박증이란게 숨어 살고 있는데, 아마도 이 놈이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많아지면 신경쓸게 더 많아지니까. 해야하는 게 많으면 어디선가 작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니까. 이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17년을 살았고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것을 하려고 손을 뻗어보니 닿질 않아. 타인이 새로운 걸 시도할 때, 그리고 실패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보일 때 난 즐겁게 비웃었지만 정작 내가 하려니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절망을 느끼고 우울해진다. 모두가 저 앞에 있고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나는 완벽한 한 걸음 그 위에 고정되어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내가 17년을 서 있었던 한 발자국의 틈은 나의 발에 아주 딱 맞게 음각으로 새겨져, 발이 빠지질 않는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내 발이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내 행동을 지배했던 강박증이라는 악마가 내 머리에, 마음에, 가슴에, 심장에, 몸 구석구석에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 검은 모습이 보여.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0은 아름답지 않다, 정의내리기에 따라서 완벽하다고 할 순 있을지 모르지.

새로워지고 싶다.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다.

나는 중학생 시절에 온라인 RPG 게임을 많이 했는데, 항상 레벨 20정도를 넘기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스탯 하나를 잘못 찍었다는 이유로 나의 분신은 사라지고, 새로운 놈이 만들어졌다. 그 놈도 스킬 하나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사라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같은 선택을 했던 모양이다. 영원히 나의 레벨은 0, 완벽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강하지는 않다. 진보가 없다. 나아가지를 못한다

너는 비웃겠지.

너에게는 눈 앞의 목적을 향해 이 일, 저 일을 거쳐가는 게 그렇게 쉬울 수가 없겠지. 하지만 평생을 이 곳에 서 있었던 난 다리가 굳었다. 언젠간 걸을 수 있게 될 날만을 생각하고 있어.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마라토너들은 이미 3km 지점을 넘어 달려가는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나도 뛰고 있지만 느리기 때문에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있던 나를 이제야 자각했으니까. 그리고 아직도 어떻게 뛰는 건지, 아니 걸음마도 할 줄 모르는 17살이 되었으니까.

이제 내 삶은 건조하지 않다. 건조했던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내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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