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

2006/06/09 07:31
도시에서는 다소 떨어진 언덕에 노인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와는 달리 노인의 집은 한적했고 주위에는 많은 꽃과 나무가 자연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노인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정원에도 많은 희귀한 꽃들을 가꾸어 놓았다. 조용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그였으나 한 때는 유명한 SF 작가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그는 많은 책들을 저술했고 그의 책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새 책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을 때로는 놀라게, 때로는 즐겁게 그리고 때로는 공포에 떨게 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일 뿐이다. 지금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이 기다리는 소설가가 아니다. 나이든 그는 젊은 시절의, 어찌 말하면 당대의 문화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법한 표현력과 감성을 잃었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매일 글을 쓰는 그였으나 도시를 떠나 조용히 하루의 즐거움으로 글을 쓸 뿐이었다. 도시인들은 한 때 그들을 즐겁게 하였던 한 작가가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다는데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아니, 노인이 사는 곳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노인에게는 날마다 쓰는 짧은 글들을 정원의 꽃들에게 읽어주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안식이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노인은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다. 노인은 정원에 나가 꽃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모로!” 노인은 그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집필하던 장편 SF 소설에 나오는 우주 민족의 아침 인사를 남몰래 꽃들에게 해 주고는 했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의 그에 대한 기억과 애착이 남아 있었다. 꽃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노인은 오래 써온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서 역시 익숙한 펜을 들어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노인이 고개를 드니 벽에 걸린 달력에는 “2099/12/31”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제 곧 2100년이구나.”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젊었을 때의 많은 창작물이 2100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니 노인에게 2100년은 매우 뜻 깊은 해일 것이다. 노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펜을 들었다.

마호가니 의자 위에서 노인은 몸을 길게 뻗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의자에 달린 터치휠을 조작했다. 그러자 노인만을 위한 조용한 집은 곧 온 곳에 생기가 넘치는 활기찬 공간으로 변했다. 독자들이 노인의 2100년을 기념해 주기 위해 깜짝 등장한 것도 아니고 노인의 값비싼 수집품들을 빼앗으려 강도들이 침입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노인 이외의 사람이 그 집에 있었다면 생기 넘침에 숨어있는 수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바뀌게 된 이유는 집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노인의 지시를 기다리는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노인은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 옆으로 사람 모양의 물체가 뚜벅 뚜벅 걸어왔다. 노인의 작품 ‘2100년 어느 날의 석양’에 등장하는 악역의 휴머노이드 ‘이드’와 완전히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드의 욕지거리가 전부인 대사와는 정반대인 공손한 분위기의 정중한 말이었다.

“아침 식사로는 무엇을 가져다 드릴까요?”
“간단하게 스크램블드 에그(scrambled egg)로 하기로 하지.”
“무엇을 마시겠습니까?”
“오늘은 어떤 것들이 있지?”
“레드 와인, 오렌지 쥬스, 우유나 다른 시중에서 파는 음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레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소량일지라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니 다른 것을 마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뭐, 그렇다면야 쥬스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스크램블드 에그와 오렌지 쥬스를 3분 안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드의 자연스럽고 공손한 말투는 노인에게 마치 간단한 음식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손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휴머노이드는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의 뚜벅 뚜벅 또렷한 소리를 남기며 노인에게서 멀어져 갔다. 노인은 이드가 자꾸 자신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노인의 나이가 격한 운동에는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드가 자신이 좋아하는 레드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질려버렸다.

가느다란 노인의 손가락이 터치휠을 다시 한 번 조작했다. 그 동작은 간결한 것이었으나 노인의 책상 앞 벽 전체가 스크린으로 변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조작이었던 모양이다. 노인의 검지손가락이 휠을 누르자 스크린에서는 도시에 방영되는 TV의 화면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2100년이 내일이라 그런지 과거 100년 간 있었던 주요한 일에 대한 것들을 정확한 말투로 한 -사람 모양의 물체-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 모양이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인이 보기에는 그녀는 사람이었다. 매력적으로 생긴 그녀의 외모에 노인은 TV의 내용에 순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똑한 콧날과 빠져들 것만 같은 깊고 검은 눈동자, 그리고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단정한 단발머리. 이목구비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잘 나가던 작가 시절 사귀었던 유명 여배우를 생각나게 하는 숨 막히는 외모였다. 한 가지 분명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TV의 여자의 이마에 있는 작은 문양이었다. 작은 원형 무늬의 중앙에 R이라는 알파벳이 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끼워져 있는 모양. 이드의 이마에도 찍혀있는 ‘낙인’이다. 단지 이 작은 표식 하나가 TV 속의 그녀를 노인과 동떨어진 세계의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R, robot이다. 이드와 같은 휴머노이드. 노인은 R로 시작하는 많은 단어들을 떠올려 보았다. Royal, Rose, Romance, Real… 그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이다지도 많은데 그녀를 Robot이라는 단 한 단어로 규정짓고 제한한다는 게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노인은 키득거렸다. 단지 TV에 나온 휴머노이드 한 ‘개’ 때문에 이런 회의감에 잠긴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어찌 되었든 TV 프로그램은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신체를 교체할 수 있는 사이보그 부품의 최초 개발과 실용화나 광년 거리의 우주 공간 여행, 허공간을 이용한 교통수단의 혁신적 발전, 인류가 지배하게 된 행성들에 대한 이야기 꽤나 유익한 이야기들을 이름 모를 아름다운 휴머노이드가 또박 또박 읽어주고 있었다. ‘이 이야기들도 꽤 오래된 이야기들이지.’ 노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이 많은 혁신적인 진보,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사건 이상의 것들은 대부분 과거 노인의 소설에 등장했던 것이었다. 노인이 이들을 예측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당시 노인의 나이는 28세였다. 2100년인 지금, 과거 오늘날의 일을 예견했던 노인의 나이는 118세가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노인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고령의 ‘늙은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리라. 2010년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장수는 이미 노인의 현재에서는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이 되었다.

TV에서는 여전히 사이보그 부품들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고 있었다. 초기, 사이보그 부품들이 인간의 신체를 최초로 대체하는 몇 차례의 수술이 진행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과 종교 단체들의 반발을 받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윤리적인 문제, 사람의 신체에 정신이 깃드는 것이라는 철학적 반박은 기계 신체가 가져다주는 여러 이점에 가려버렸고 종교도 이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종교는 2050년 즈음해서 일명 ‘과학교’ 열풍에 무너져 내렸다. 과학교 열풍이란 노인의 소설들이 대중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서 무언가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과학적’ 공헌이 가능한 것이라면 종교는 그것을 방해하는 쪽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사건이다. 그처럼 그의 소설은 미래를 예견하였고, 미래를 창조한 것이었다.

정작 노인은 이 모든 것에 신물이 나 도피했다. 아무도 모르게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찾아낸 곳이 바로 노인의 집이 자리한 언덕이다. 이제 TV에서는 노인의 소설을 소개하고 있었다.

“… 그의 ‘2100년 어느 날의 석양’을 비롯한 수많은 소설들은 이제 SF, Science Fiction 이 아니라 SN, Science Non-fiction으로 불려야 할 것입니다. 이 소설들은 전문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자연스레 접근해 과학에 대한 관심과 진지한 접근을 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과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영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몇 년 전 실종되지만 않았어도 2100년의 첫 시작을 그와 함께 이 자리에서 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노인은 또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휴머노이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이드가 아침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적당히 요리된 스크램블드 에그와 레드 와인은 그의 구미를 당겼다. 노인은 순간 당황했다.

“이드, 레드 와인은 왠 거지? 난 분명 오렌지 쥬스를 달라고 했잖나. 레드 와인을 마시지 말라고 한 건 이드 너인데.”
“실례입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왠지 레드 와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마침 오렌지 쥬스를 찾지 못한 게 사실 이유지만요.”
“그렇군. 그런데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난 잘 모르겠는데.”
“작가님의 소설은 저도 읽었습니다. 2100년은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해야 할 그런 해이죠.”

휴머노이드의 대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이 이드의 입에서 나오는 통에 노인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휴머노이드에게 노인의 미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나 보다. 이드는 곧장 노인에게 다소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갑작스런 미소는 무엇이죠? 아까 TV에 나오던 휴머노이드 여성을 보고 작가님께서 웃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비웃음이 분명합니다. 휴머노이드도 인간하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웃음은 적절하지 않은 처세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노인은 이드의 말을 끊고 외쳤다.

“어째서지?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달라. 일단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부터가!”
“그렇습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는 작가님은 가슴에 기계를 달고 있는데요. 그런 불완전한 그릇에 담긴 작가님의 정신은 온전한 인간의 것입니까?”

휴머노이드에게 늙은 인간은 정곡을 찔렸다. 노인은 심장이 없다. 대신에 그의 몸 곳곳으로 붉은 액체, 산소를 담고 있는 생명의 액체를 뿜어내는 작은 기계 펌프가 있다. 이드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드도 노인이 하는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노인의 손가락, 여전히 가느다랗고 핏기 없는 손가락에 규칙적인 작은 진동이 감지된다. 두근. 두근. 노인은 어릴 적부터 심장은 두근 두근 뛴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여기 뛰고 있는 것은 심장이 아닌 기계라는 자각에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노인은 펜을 놓았다. 만족스러운 글이 되었다. 아침에 집필을 시작한 이후로 주욱 써 내려왔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흥얼거리며 먹지 못한 아침 대신 배를 채워줄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달걀을 두 개 꺼냈다. 매일 해 오는 가벼운 몸동작으로 힘들이지 않고 달걀을 깬 뒤 프라이팬에 붓고 요리했다. 노인의 요리는 즐겨먹는 스크램블드 에그였다. 노인은 요리에 그다지 소양이 있지는 않지만 매일 하는 음식이다 보니 익숙했다. 음식이 다 되자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 소파에 앉아 달걀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았다. “2099/12/31” 나지막하게 노인은 중얼거렸다. “얼마 안 있으면 그 2100년이구나. 그런데도…” 노인이 많은 SF 소설을 쓰고 한 때 수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소설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늘 쓴 노인의 글은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영감에 쓴 것이었다. 손으로 리모컨의 전원 단추를 꾹 눌러 TV를 틀었다. “조금 있으면 2100년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대되시죠?” TV안의 여자가 즐거운 듯 말했다. 이마의 낙인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노인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자 입가의 주름, 조그마한 흉터, 대칭적이지 않은 코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름다웠다. 노인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껴 눈을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노인 집 옆에 난 도로-그와 도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로 트럭이 배추를 잔뜩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매연을 뿜어대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노인은 즐거웠다. ‘내일은 맛있는 김치도 해 먹을 수 있겠구나. 정말 이드가 있었더라면 좋았겠군. 이드한테 시키면 김장 정도는 일도 아닐 텐데.’

가만히 손을 가슴에 얹어보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다. 약간은 불규칙한 그의 심장 박동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두. 두근.


유키토 키시로의 총몽에 나오는 이드는 전혀 악역이 아닙니다. 계획 안하고 써지는 대로 쓰다보니 A4 5장이나 나오는 난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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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글 2006/06/09 15:22 edit rply

    오! 상황 설정은 형이 설정한거야?
    다른 애들은 미연시의 영향으로 패고 다치고, 죽는 게 꼭 들어가던데 -_-;
    가슴에 훈훈함을 남기는 콩트였어.

    (나도 급하게만 쓰지 않았어도 절제된 글이었을텐데 OTL)

    • ataiger 2006/06/09 22:02 edit

      나도 1시간 급조~~
      그래도 전체적인 내용은 3년 전에 생각해 본거라서 쓰기 편했어.

  2. ..... 2006/06/11 11:07 edit rply

    달 읽지 못하는 난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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