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 1

2006/11/14 08:02

설명


기운은 마주 앉아 있는 친구 A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운의 표정은 실로 멍청해 보였지만 그의 큰 머리 안의 두뇌, 그 안의 수많은 뉴런들, 그리고 그 뉴런들 사이의 시냅스들은 결코 멍청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화학 정보들은 그의 두뇌 안에서 사고가 일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구나.’

10초 전, A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기운으로 하여금 A를 미친놈 취급하게 하였다. A의 목과 턱, 그리고 입술은 다음과 같이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야 드디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어.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 우리는 외계생명체야. 지구의 ‘인간’이라는 종은 우리가 숙주로 선택한 종이고.”

지금 기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외계생명체라고? 너 이번에 문학 숙제로 제출할 소설 구상하고 있니?”

“아니, 좀 진지하게 들으라니까? 난 장난치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정말 외계 생명체야.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껍데기는 우리와 같이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타고 있는 멍청한 생물체의 육체일 뿐이라고. 우리의 본질은 따로 있어.”

“계속 이야기 해 봐.”

“우린 검은 민달팽이야.”

기운은 여기서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A가, 그리고 내가. 더 나아가 나의 부모님, 동생, 그리고 여자 친구까지도 검은 민달팽이라는 것인가? 이제 A가 혹시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A는 평소에 실없는 농담을 즐기는 녀석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다니 분명 이 친구는 병원에 데려가야 할 상태다. 혹시 최근에 망친 미적분학 시험이 이 녀석을 미치게 한 요인이 하나일지도 오른다는 생각을 하며 기운은 이 헛소리를 계속 들을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은…….

“너, 지금 혹시 우리가 검은 민달팽이고 지구의 ‘인간’이라는 종에 기생하고 있으며 아마 뇌나 다른 중추 신경 기관에 머물며 육체를 컨트롤 한다고 말하려고?”

“와! 너도 알고 있었니? 난 어제야 알게 되었는데.”

“아니, 단지 네놈이 할 말이 너무 뻔히 보이는 걸.”

“잘 들으라고 했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검은 민달팽이야!”

이제는 되레 소리까지 쳐 가며 열심히 자기의 민달팽이 설을 주장하는 녀석을 보며 기운은 짜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씹듯이 입을 움직이다가 결국 내뱉었다.

“그럼, 증명해 봐!”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렸어.”

이렇게 말하며 A는 마치 귀를 움직이려는 사람이 온 신경을 얼굴에 집중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간 기운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A의 얼굴은 분명 그대로였다. 별로 잘 생기지 않은 코, 과연 이 녀석이 죽기 전에 키스 한 번 할 수 있을까 걱정해주게 하는 입술, 그리고 소행성의 표면과 같은 피부. 아니, 한 가지가 바뀌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채었다. A의 눈은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안구와 안구를 감싸는 피부가 점점 벌어졌다. 기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식당에는 그와 A뿐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여줄 테니”

A의 몸은 축 늘어졌다. A가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팔로 몸을 식탁에 기댄 상태로 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냥 팔을 턱에 괴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안구와 피부는 계속 벌어지더니 그 사이에서 검은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물거리는 그것이 슬슬 눈구멍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민달팽이였다.

기운은 너무나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눈앞에서 A는 육체를 버리고 검은 민달팽이가 되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의 ‘기생상태’를 끊고 기운이 A라고 생각했던 육체 밖에 나와 있다. 기운의 얼굴은 다시금 멍해졌다. 이번에는 그의 시냅스까지도 멍청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운의 큰 두뇌는 판단을 내렸다.

A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 즐겁기라도 한지 즐겁게 몸은 꼬물거리고 있었다. 5cm 가량의 통통한 검은 민달팽이가 몸을 꿈틀거리는 것은 역겨움 이전에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A를 기운은 손으로 잡았다. 순간 A는 당황했는지 몸은 마구 비틀기 시작했다. 뭔가 외치고 싶은 동작이었으나 성대가 없는 민달팽이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기운은 그런 A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발로 밟았다. 그리고는 불이 붙은 담배를 비벼 끄듯이 A, 아니 검은 민달팽이의 몸 위에서 발을 이리저리 비볐다. 민달팽이가 납작해지도록. 그가 납작한 포가 되어 완전히 움직임을 정지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운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빠른 발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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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블XQ 2006/11/14 23:28 edit rply

    앗 왜 죽여요 ㅜㅜ

  2. Nu_Arbalest 2006/11/15 08:29 edit rply

    ......급하게 죽이고 나갔군

  3. ataiger 2006/11/15 08:36 edit rply

    아무도 이 소설에서 A가 왜 죽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4. 파편 2006/11/15 14:26 edit rply

    그야 민달팽이니까
    눈도 튀어나왔고

  5. 미션리터 2006/11/15 21:17 edit rply

    인간의 개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 세계는 개념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는 법이니까

    • ataiger 2006/11/16 19:05 edit

      그래, 처음에 A를 죽이려고 한 것은 단지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 였지만 나중에 스스로 이 이야기의 결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나도 너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6. 동글 2006/11/17 17:35 edit rply

    그런데 왜 한명은 A고 한명은 형이야?

    • ataiger 2006/11/17 17:52 edit

      '기운'이라는 사람에게는 실존성을, 'A'에게는 비실존적 특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좀 글을 많이 쓰게 될 것 같은데 대부분의 이름은 그렇게 할 거다.

  7. rematto 2006/11/18 22:54 edit rply

    대개 결말을 짓기 어려운 초기작가들이 등장인물 중 하나가 죽는 결말을 많이 채택한다지...

    • ataiger 2006/11/19 20:22 edit

      그래도 이 죽음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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