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2007/01/04 14:52
그럴 때 있지 않아? 난 분명히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학교에 등교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거나… 그런 거.

아니.




기운의 눈은 감겨있었다. 마치 잠을 자는 사람처럼. 인간의 시각이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정보를 전달하는 감각들 중 가장 발달해 있고 주가 된다. 따라서 이처럼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시각이라는 감각을 포기해, 주변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기운의 경우 전자도 후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잠이 올 뿐이었다. 시간은 이른 아침이 분명하였으나, 전형적인 올빼미 족의 생활습관이 그대로 몸에 배어 있는 그이기에 활동 시간이 아닌 그 시간에 깨어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곧, 잠을 자는 그는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채로 걷고 있었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까? 기운은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두 다리를 포함한 하반신은 그의 눈꺼풀에서 일어나는 그런 작은 변화 따윈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이 걷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왼쪽 다리를 들고, 내딛고, 오른쪽 다리를 들고, 내딛는다. 기본적으로는 위와 같은 단순한 행위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두 발로 보행하는 것이 본능의 수준에서 행해지는 호모 사피엔스의 아름다운 걷기였다. 눈을 뜬 기운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뛰어난 다리는 걷기에 충분한 운동 능력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왜 걷고 있는 거지?’

‘이상하다.’ 기운은 생각했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새로 시각이라는 감각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운의 신체, 그리고 아마도 그의 큰 뇌에 ‘존재할 수도 있는’ 자아는 주변 상황을 탐색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총동원했다. 수면에서 갓 깨어나 어린 아이와도 같이 안정되지 못한 신체였기 때문에 탐색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의 하반신은 이와 무관하게 계속 걷고 있다. 횡단보도를 막 건너서 인도로 올라서는 턱도 문제없이 깨끗하게 올라섰다.




“꺄악!”

A는 방금 비명소리를 들은 참이다. 그의 뇌는 이 소리의 분석에 들어갔다. ‘예쁜 목소리다. 그럼 얼굴도 예쁠까? 난 비명소리의 아름다움과 그 소리를 만든 인간의 얼굴이 가지는 미에 대한 정확한 상관관계를 알고 있지 못한데, 이번에 확인해 봐야겠다.’ 라는 것은 A가 이미 다른 사고를 끝낸 뒤에 만들어낸 어이없는 변명에 불과한 해석이다. A는 비명소리를 들었고, 왜, 그리고 누가 비명을 지른 것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발길을 돌렸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비명소리를 듣기 전에 ‘끼이이익!’하고 차가 미끄러지는 소리, 그리고 ‘쿵!’하고 세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교통사고겠네.’




기운은 자신이 등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교?’ 그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닌다. 그의 등굣길은 결코 이렇게 길 리가 없다.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멍청한 눈을 몇 번 더 깜빡거린 다음에야 이게 무슨 등굣길인지를 깨달았다. 중학교다. 그가 다니던 중학교. 그가 걷는 길 오른쪽으로 인도와 같은 폭의 자전거 전용도로-물론 인도와 별 차이가 없으나-가 있었고 또 그 오른쪽은 그가 거주했던 아파트의 갈색 담벼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갈색 담은 매우 특이하게 쌓아 놓은 거라서, 벽돌들이 규칙적으로 담 바깥쪽으로 돌출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움푹 패인 곳도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전에 이 길을 지나면서 ‘저 담에 부딪힌다면 꽤나 아프겠네.’란 생각을 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왼쪽에는 도로가 있었고, 그 건너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이 있었다. 얼마 후에는 이곳엔 건물이 생긴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아하! 난 지금 과거에 있는 거로구나?’ 그 앞쪽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친숙한 풍경이다. 이제 기운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계속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의 위화감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A는 (자랑은 아니지만) 그의 작은 키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지나다니며 쉽게 ‘현장’에 도착했다. 검은색 세단과 보행자가 부딪힌 모양이었다. A는 서둘러서 아까 그 비명을 지른 사람을 의식적으로 찾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누가 방금 비명을 질렀나요?”라고 묻는다면, 미친놈 취급 받을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A는 그건 그쯤 해 두고 이제 누가 사고를 당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조금 더 ‘현장’으로 다가가 보았다. 세단에서는 누가 내려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세단에서 내린 그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A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캐주얼 룩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양복이 맨 보라색 넥타이는 조금 신경 쓰였다. ‘어쨌든 누가 다쳤는지 확인해보자. 예쁜 여자라면 응급처치를 해 주어야지!’

사고를 당한 사람은 A가 잘 아는 기운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등교를 하고 있는 학생들도 없었다. 기운은 자신이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채며, ‘아무도 등교를 하지 않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괴이한 부류의 쓸쓸함을 느꼈다. 이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등교 시간에 이 길 옆의 도로에는 출근 차량들이 보였는데 오늘은 그런 차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 버스도 물론 없었다. 심지어는 참새나 제비도 없었다. 기운은 홀로 등교하고 있었다.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생각을 하는 주체인 뇌가 흔들리기 때문인지 정신이 맑아지는 착각이 든다. 기운은 정말 성의 없는 설명인 것에 스스로 놀랐다. 머리를 흔들면 과연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인가? 각설하고, 어쨌든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보이는 색이 조금 이상하단 생각도 들었다. 약간 세피아 톤의 느낌이 나는 색감이었다. 평소에 기운이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그리운 느낌이었다.

‘설마 나, 뒈지는 건가.’




기운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팔도 조금 오묘한 각도로 꺾여 있는 게,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A는 어제 자신은 뼈가 부러지거나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입어본 적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다며 자랑하던 기운이 기억나서 조금 측은하면서도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의 사람이 벌써 119에 전화를 건 듯 했다. 그럼 이제 A가 할 일은 없는 셈이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목 부러져서 진짜 죽어버리면 큰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어도 기운은 곧 죽을 듯 했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A의 신발 밑창에 조금 닿았다. 그만큼이나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운의 얼굴은 정말로 창백해서 그 아래 위치한 두개골과 턱뼈가 비쳐 보일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지켜보고만 있었다. 기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아까 언급한 그 팔만 제외하면 그냥 자주 보던 기운의 모습인데, 저렇게 쓰러져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었다. 보라색 넥타이의 남자는 세단에 올라타서 그냥 가버렸다.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했으나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흘리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기로 사람들을 제압하다니……. 무림 고수라도 되는 건가.’ A는 스스로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한 것을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기운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에 A는 차의 번호판을 외워두려고 했으나 딸리는 기억력 탓에 실패하고, 무슨 차였는지 기억하려고 했지만 외제차라서 알 수가 없었다. 참 무능력한 A다.




기운의 다리는 계속 행군 중이다. 쉬지도 않고 계속 걷는다. 척척척척. 등굣길도 그런 다리에 맞추어 주욱 늘어나서 끝도 없게 되어버렸다. 울퉁불퉁한 담장도 같이 죽 늘어났다. ‘저 무한한 길이의 담장에 쓰인 벽돌의 개수는 몇 개?’

‘우직’하고 기운은 무엇인가를 밟았다. 분명히 좋은 느낌은 아니다. 기운이 뭔가를 밟아서 그게 뭔지 확인했을 때는 반수 이상이 껌이었다. 제거하는데 꽤나 인내심을 요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우직’이라는 소리가 났다. 밟은 물체가 단단한 것이라는 말이다. 플라스틱 뚜껑일 수도 있으나 그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 이런 회상씬scene에 등장한다면 참 맥 빠질 거란 생각을 하면서 애써 부정했다. 발을 들어보니 이건 더 심한 경우였다. 바퀴벌레였다.

기운은 바퀴벌레가 어떻게 생긴 건지 잘 알지 못한다.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태껏 살았던 집에서 집개미는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바퀴벌레가 살았던 적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기운은 벌레를 매우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바퀴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져서 정말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기운의 왼쪽 신발 바닥에 붙어버린 바퀴벌레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으로 이게 바퀴벌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은 기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하다. ‘이건 내가 바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라서겠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이 18에 바퀴벌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니. 별종이다.




구급차가 도착했다. A는 안도했다. 기운이 여기서 죽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험 조별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기운이 빠지면 자신의 할 일이 늘어난다. 스스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역시 이 전국 난세의 시대에 이정도의 비정함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는 변명으로 해결했다. 뭐, 조조도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 일가를 몰살하지 않았는가? A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구급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은 기운에게 달려갔다.




바퀴벌레의 등에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삶’ 그 위에 써진 단 하나의 글자다. 한글인지 영어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기운의 의식은 불분명했다. 마치 꿈과 같은 상태였다. ‘아니 이거 혹시 꿈인가?’ 기운은 꿈이라면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삶’이 영어라면 ‘Life’가 되겠지. 문자가 네 개야. 바퀴벌레 등에 붙은 종이에 쓰이기에는 너무 길다. 그럼 역시 ‘삶’이겠지, 한글로.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 글자는 뭐지?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가지의 알약을 주었다. 빨간 알약, 파란 알약.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당장 선택을 내릴 것을 강요했다. 네오는 결국 빨간 알약을 먹었다. 이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기운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기운은 삶을 선택하기 위해 이 바퀴벌레를 먹어야 하는가? 기운은 그럴 거라고 느꼈다. 본능이었다. 게다가 바퀴벌레는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았다. 바퀴벌레처럼 보이지도 않아서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물리학도 기운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떠올렸고 스스로 흡족해했다. 그 와중에도 바퀴벌레의 모습은 계속 흐릿한 채로 이리저리 바뀌어서 심지어는 정말 작은 ‘바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바퀴벌레를 오른손으로 떼어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몇 번 씹어보았다. 종이도 같이 입 속에 들어갔는지 종이 씹는 느낌이 조금 났다.

기운의 눈앞에 모피어스 비슷한 놈이 나타났다. 브루스 올 마이티에 나오는 흑인 신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영어로 뭐라고 주절거렸는데 기운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해버리고 주변을 더 살폈다. 그러자 기운은 세피아 빛의 풍경이 조금씩 원래의 색을 찾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은 더 이상 그가 다니던 중학교의 등굣길 주변 풍경이 아니었다.




구급대원이 막 기운에게 손을 뻗치는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났다. A는 기겁했다. ‘아니 저놈은 뭐야! 터미네이터라도 되나?’ 그러더니 기운은 조용히 부러진 팔을 구급대원 어깨에 올리고 뭐라고 속삭였다.

“바퀴벌레도 나름대로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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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션리터 2007/01/04 17:05 edit rply

    글씨가 갑자기 작아져서 읽기가 힘들어 집컴으로 바껴서 그런가?? -_-;;

    • ataiger 2007/01/04 17:39 edit

      IE라면 "보기 - 텍스트 크기"의 설정이 어떻게 되어있나 확인해 봐

  2. Wind 2007/01/06 19:59 edit rply

    나에게는 문학적 재능이 없어서 그런지 이해불능...

    • ataiger 2007/01/08 02:39 edit

      이해불능이라면 너를 탓하지 말고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욕구를 가진 나를 탓해라.

  3. 미션리터 2007/01/07 18:41 edit rply

    오오 과연 이제야 잘보이는군.

    임사체험이야기? 바퀴벌레를 먹은것도 아니면서 바퀴벌레가 맛있다니 -_-ㅋ

    • ataiger 2007/01/08 02:39 edit

      바퀴벌레 맛있을껄? 중국 사람들 잘 먹잖아.

  4. Wind 2007/01/08 06:26 edit rply

    창작의 욕구는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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