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나리오 1

2006/05/07 20:32
지금부터 쓸 이야기는 오늘 내게 있었던 일인데 문학 수행평가 중 하나인 영화제작의 시나리오로 매우 괜찮은 듯 해서 간단히 정리 해 본다. 당사자인 내게는 매우 아이러니컬하고 상황의 전개와 극적인 효과가 아주 돋보이는 이야기다. 같이 이 사건을 겪은 친구도 내가 영화 시나리오로 하지 않으면 자기가 해서 제출한단다.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오늘 내 기숙사 방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방에 들어온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의자에 앉았다. 평상시와 전혀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옆에서 내 룸메이트 Y는 무언가를 자기 책상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린 서로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문득, 내 방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Y야, 이 책 내꺼 아니야?"
"어? 니꺼였어?"
"이 책 내가 보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책장에 꽂아두었던건데..."
"아, 그거 아까 내 방에 왔던 L이 보더라."
"뭐? 그 놈이 봤다고? 이 목검은?"
"그것도 L이 가지고 놀다가 갔어."

'스토리보드의 예술'이라는 책은 내가 분명 책장에 가지런히 두었는데 목검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평소 결벽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리정돈에 열심이고 남이 내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나는 Y의 말을 듣고 L에게 한소리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학교 식당에서 맛없는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우, 이제 밥도 먹었으니까 공부해야지. Y 너도 기숙사에 있을거지?"
"응, 일단은."
"어?"

분명 내 의자 위에 있어야 할 '방석'이 없었다. 나는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 이불도 들어보고, 침대 밑에 들어가지 않았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난 방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작은 기숙사 방에 내 눈을 피해 방석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없었다.

"왜 그래?"
"Y야, 내 방석이 없어."
"방석? 어, 정말 안보이네"

내 방에 있던 내 방석은 내가 매우 아끼던 방석이다. 크기도 크고 푹신푹신해서 아주 편하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Y, 아까 이 방에 L이 왔다고 하지 않았어?"
"응, L이랑 H랑 왔었어. 우리 문학 영화제작하는 수행평가 때문에 시나리오 좀 토의하느라고."
"L이 내 방석 건드리지 않았어?"
"모르겠는데... 내가 아마 걔네들 있을 때 잠깐 잠들었던 것도 같다."
"이런 젠장, H가 그랬을 리는 없고 말이지. 걔는 남의 방석이나 들고 갈 놈이 아니야. 혹시 L일까?"
"..."

L이 들고가는 건 못봤단다. 사실 L도 도둑질이나 할 놈은 아니었다. 요즘 학교에서 도둑질이 간간히 일어나서 문제인데 혹시 내 방석도 누가 도둑질한 건 아닌가 의심이 갔다. Y는 아마 누군가 빌려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누가 남의 방석을 빌려가겠는가? 그것도 허락 없이! 나는 도둑질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Y, 나는 도둑질하는 녀석들은 퇴학은 물론이고 사형감이라고 생각해."
"누가 도둑질을 하는데?"
"요즘에 누가 남에게 온 택배를 몰래 들고가려다가 잡혔다고도 하고 누구는 또 다른 일로 걸렸다고 하더라고."
"직접 본거야?"
"아니 애들이 하던 말이야"
...

이런 식으로 20분 가량 대화를 하다가 짜증나서 과자도 먹고 먹으면서 비만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가 맹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내 친구는 말이야, 맹장 수술하고 나서 살이 찌더래."
"별 상관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맹장 수술했어."
"그랬어? Y, 맹장 수술하면 아파?"
...

무의미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Y야, 한번 나가볼까?"
"어딜?"
"방석 찾으러"
"방석은 누가 훔쳐간거라면 숨겨 놓았겠지 설마 보이게 놓았겠니?"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내 방 근처의 문이 열려있는 방들을 지나다니며 유심히 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부분 방에 없었고 방은 문이 닫혀있거나 열려있는 방도 어두컴컴했다. 유독 한 방만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거기에는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와 그의 엉덩이 사이에는 갈색의 커다란 방석이 마치 햄버거 사이에 들어간 고기처럼 들어가 있었다. 내 방석은 갈색에 꼭 그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놀라 자세히 보거나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Y, 어떻게 하지?"
"왜?"
"우리 옆옆옆방에 내 방석이 있는 거 같애"
"그래?"

Y는 잠시 나갔다 오더니, 내 방석하고 비슷하기는 하지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내 엉덩이와 오래 동고동락한 방석을 내가 모를리 없었다. 나는 분명 그 방석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Y가 말해주고야 안 사실이지만 내 방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S였다. 경황이 없어 나는 누군지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S를 잘 모르지만 역시 도둑질을 할 사람은 아니다. Y가 말했다,

"만약 도둑질이라면 그렇게 방석 위에 앉아 있겠어? 네가 잘못 본거야."
"아니야 그건 분명 내 방석이야. 만약에, 만약에 정말 도둑질이라면 아마 내가 평소 이 시간에 독서대에 있는 것을 고려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럴리가. 도둑이 그정도로 생각 없겠어?"
"혹시 모르니까 S에게 그거 자기꺼냐고 물어볼까? 근데 그건 도둑놈 취급하는 거라 좀 그렇다."
"음, 좀 그렇네"
"내가 좀 소심해서 그런거 잘 못 물어보겠어. Y, 너는 걔 잘 알아?"
"나도 잘 몰라."
...

또다시 무의미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30분 가량 Y에게 나는 인간에게 감정이 필요요소인지, 자아가 정말로 실재하는 지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종이컵에 담겨있던 오렌지 주스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구겼다.

"Y, 나 다시 나갈래"
"물어보려고?"
"아니 종이컵 버리려고 (씨익 웃었다.)"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래! 결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쳐 넣은 다음 S의 방으로 갔다. S는 다른 의자에 앉아 있었고 S가 앉아 있던 방석은 내 것이 더욱 더 분명해 보였다.

"저기, 이 방석 네꺼야?"
"아니?"
"그럼 누구건데?"
"모르겠어. 이거 L이 와서 두고 가버렸는데."
"아이 씨 !$#^$@#. 이거 내꺼야. 가져갈게."
"응"

S가 던져준 방석을 들고 내 방에 들어가 Y에게 속사포처럼 상황을 이야기했다.

"완벽하게 톱니바퀴가 맞아들어가는구만, 이거 완전히 영화다."
"내가 자느라고 L이 방석 들고 나가는 걸 못 봤나봐"
"L 자식 나한테 원수를 졌나? 이자식 가만두지 않을거다. 자기가 무슨 꿀벌도 아니고 왜 내 방석을 가져다 그 방에 놔?"

상황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실제로는 재미있었는데 쓰니까 재미없다. 어쨌든 그 한 시간동안 내 방에서 나와 Y의 대화내용을 들은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어 할 만할 결말이다. 아까 L하고 통화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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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블XQ 2006/05/08 21:04 edit rply

    이건 뭐 종량제 대비 스킨인가요…
    아무튼 역시 나보다 글 훨 잘쓰시네염. 최고.

    • ataiger 2006/05/09 07:51 edit

      이건 내가 요즘 머리가 아파서 바꾼거야.
      나 글 못써.

  2. 화사한 봄 2006/05/10 00:30 edit rply

    ㅋㅋ 웃어 댔다
    실감나네..
    쫌생이 같은 놈
    방석 찾는 모습을 상상하니 ㅋㅋ 웃음이 나온다
    생활도 즐겁게 보내고 있겠지만
    내 생각도 좀 해 주라

  3. kissmyazzz 2006/05/10 17:08 edit rply

    읽기 귀찮으므로 스크롤 넘겼습니다.ㅈㅅ

  4. 이런 2006/05/13 22:12 edit rply

    나도 한때 소설좀 썻다는 몸이지만..


    귀찮아서 넘겼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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